문학은 쓸모가 있습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그 것은 바로 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학이란 대체 어떤 쓸모가 있는가? 실제적인 효용을 존중하며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문학이 별로 쓸모가 없는 사치스러운 학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어 할 것입니다. 문학이란 과학적인 지식도 아니며, 경제학이나 사회학 같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소용되는 것도 아닌, 이를테면 고상한 체하며 돈과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한가로운 시간에 들추어 보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그런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일군의 사람들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며, 문학은 문학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적이 되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극단론은 모두 그릇된 것일 뿐만 아니라 문제 자체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술이 실제적인 효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문학이 인간 생활과는 아무 관계없이 독자적 가치를 지닌다고 고집하는 것도 올바른 생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학의 쓸모란 무엇인가요?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문학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냐 아니면 교훈을 주는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많은 논쟁을 해 왔습니다. 이는 즐거움이 반드시 효용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둘의 일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은 이들이 분리되어서만 존재하는 소외된 세계에 우리들이 살기 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문학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냐 아니면 교훈을 주는 것이냐 하는 문제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구분을 넘어선 차원에서 대답을 찾아야만 할 것입니다.
문학은 확실히 일종의 즐거움을 수반합니다. 문학이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문학이 모방에서 나온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대로 모방이란 바로 즐거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행위란 유희 (play)를 말합니다. 그래서 문학은 다른 모든 의식 활동에 비하여 일의 성격보다는 놀이적 성격이 강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학이 주는 즐거움은 작품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릅니다. 즐거움의 종류나 정도도 각양각색, 천태만상입니다. 그것은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만일 모든 문학작품이 똑같은 웃음, 똑같은 쾌감, 똑같은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그렇게 많은 문학작품이 나올 리도 없겠지만,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비극작품이 주는 쾌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령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었을 때 (연극을 보았을 때), 작품이 주는 감동을 쾌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주인공 『햄릿』은 비극적 전형을 이루는 주인공입니다. 그는 모든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사랑에도 실패하였고, 효도나 애국과도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실패한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햄릿』이라는 작품에서 느끼는 불쾌하지 않은 감동은 무엇인가요? 결국 그것 역시 문학작품이 주는 일종의 쾌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카타르시스'라고 불렀습니다. 카타르시스는 본래 소화불량에 걸렸을 때 '위를 말끔히 씻어내는' 데 쓰이는 약 이름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이후 감정의 '정화작용'의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작품이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고 이런 정서들의 카타르시스를 가져온다.'라고 말했습니다. 고통과 패배를 맛보는 비극적 장면들이 청중을 낙담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구제감과 승리감마저 맛보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느끼는 정서 중에서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이 가장 격렬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정서는 억제만 해서는 안 되고 적절한 발산이 필요한데 비극이 바로 그런 발산의 배출구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위장에 음식이 가득 차서 체증을 느끼는 것은 신체의 불균형이지만, 격렬한 정서의 과잉 상태는 정서의 불안정입니다. 이를 해소할 때 사람들은 쾌감을 갖게 마련입니다. 말하자면 지나치게 고조되었던 감정들이 스스로 풀려나갈 때 느끼는 쾌적감, 그것이 비극이 주는 기능이며 비극적 카타르시스의 위력입니다.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즐거움은 격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격정에서 해방되는 즐거움입니다. 그것은 또 감정의 질서화이기도 합니다. 감정의 질서화란 흥분상태가 스스로 가라앉아 본래의 조화로움으로 돌아가는 통일과 충족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문학작품은 바로 이런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이 주는 즐거움을 쾌감이란 말 대신에 '감동'이나 '감화'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감동이란 말을 쓰는 사람은 쾌감이라는 말이 도덕적이지 못하고 다분히 향락주의적 혹은 쾌락주의적이라는 어감을 갖고 있기에 기피하고, 감화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가령,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주는 감동을 어떻게 단순히 '쾌락'이라는 말로 충분히 나타낼 수 없기에 '감화'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일면도 있기는 합니다. 문학은 쾌락이라는 말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실질적인 것을 독자에게 줍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 즐거움 이외에도 우리의 삶의 태도가 바뀌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고, 귀중한 가치를 얻기도 합니다.
문학의 사회적 성격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호라티우스에 의하면 문학이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든가, 또는 즐거움과 동시에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 가지의 효용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즐거움과 동시에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호라티우스 이후로 많은 문학 이론가들은 호라티우스의 이 말을 늘 되풀이하여 써왔습니다. 문학은 확실히 즐거움만이 아니라 보다 확실한 지식이나 교훈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학이 사회를 교화하는 도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독자의 기꺼운 참여로 말미암아 획득되는 심경의 변화를 말하며, 지식 내용을 전달하여 계몽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신문학 초창기에 최남선이나 이광수가 펼쳐 보였던 문학의 예를 보더라도 그들은 문학을 통해 한국 민족의 교화를 꾀했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주장한 문학사상을 계몽주의라고 부르며 이들의 작품에서 전해지는 문학의 감화란 바로 교화입니다. 이광수의 『흙』은 당대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 있던 한국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교화하려고 쓰인 작품임이 분명합니다. 단테는 『신곡』의 목적이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불행으로부터 행복으로 이끌어가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신곡』의 목적이 실천적 도덕을 가르치는 윤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단테는 문학을 통해서 실제적 교훈을 강조했는데, 문학이 윤리적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주장은 호라티우스의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즐겁고도 유익한 것, 효용 가치가 있는 것이 문학이라는 생각은 특별히 새롭거나 기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도 문학의 교훈성과 쾌락성을 지적하였습니다. 다만 호라티우스에게 와서 이 둘을 동시에 언급했을 뿐입니다. (이상섭, 『문학 이론의 역사적 전개』 참조)
서양의 중세 시대에 팽배하였던 교훈주의 문학관에서는 문학이 쾌락적 수단을 이용하여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례로 『일리아드』는 재미있지만 실상은 그 뒤에 숨어 있는 도덕적 진리만이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문학의 쾌락적인 면이 교훈의 필수적 수단이라고 강조한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의 혜택은 잘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사는 동안 불안감 없이 평안하고 유쾌한 삶을 살게 하며 죽은 후에는 다른 영원한 삶에서의 영구한 행복을 확약해 주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교훈에는 귀를 잘 기울이지 않되, 이야기와 기타 즐거운 사실에는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고로, 쾌감과 보편적 유용성을 생각하여 옛이야기와 전쟁 이야기들에 인생에 대한 지고한 교훈을 섞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즐겁게 들리도록 만들어준 옛 시인들을 높이 찬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교훈이 꾸밈없이 주어졌다면 아마 별로 즐거움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사람의 생활을 완전케 만들 교훈을 즐거움과 섞는 자들이니, 시는 누구나 마땅히 최고로 훌륭한 것으로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트리시노, 『시학』
문학의 교훈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확실히 호라티우스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고 있는 교훈설이 좁은 의미의 윤리와 도덕만을 지칭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가 가르치고 있던 귀족 자제였던 피소스에게 보내는 서한체의 시에 (Epistle to pisos; 피소스와 그의 두 아들에게 부친 시에 관한 긴 서한) 나타나 있는 'Prodesse'라는 말뜻도 '인격을 향상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문학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한 말입니다. 말하자면 문학이란 미개한 백성에게 지식과 지혜를 주어서 개화 문명으로 이끄는 일도 하는 것이며, 질서 개념을 주입해서 법률을 유지하는 일도 문학이 담당하는 것이며, 청년들의 정신 속에 영웅적 인기상을 심어 주는 일이라든지 즐거울 때 반려가 되고 슬플 때 위안이 되는 일이라든지, 위인의 사적을 영구히 보존해서 그들의 이 틈을 신성하게 하는 일까지도 문학이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학의 효과는 쾌락과 결합할 때에 가장 크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문학의 윤리적 성격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문학이 우리의 체험에 형태와 질서를 부여하고, 우리가 부딪치고 해결하여야만 되는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는 주장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은 암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필립 시드니는 문학의 효용을 최대한도로 주장하여 문학의 쾌락성을 높이 샀으며, 또 그 못지않게 문학의 교훈성도 강조했습니다. 그는 문학의 쾌락성과 교훈성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합쳐서 기능을 발휘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을 사람답게 되도록 가르치는 세속적 학문은 세 가지라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철학·역사·문학입니다. 그런데 철학은 완전히 추상적으로, 역사는 완전히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데 반하여, 문학은 추상적 윤리 사상을 구체적인 예를 통하여 가르치므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문학이란 즐거움을 통하여 교훈이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고전 시대부터 내려오는 이른바 문학당의설입니다. 시드니는 이를 '앵두 과즙약'이라는 비유로 쓰고 있습니다. 시드니의 이 비유적 말은 설득력 있습니다. (이상섭, 위책)
시인은 길을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그 길에의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주는 까닭에 어떤 사람이라도 그 길에 들어서고픈 매력을 느끼게 합니다. 시인은 당시의 여행이 아름다운 포도밭을 통과할 것이라는 듯, 먼저 당신에게 포도송이를 주어 당신으로 하여금 그 맛에 혹하여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주석이 필요한 알쏭달쏭한 정의들로 시작하지도 않으며, 의심쩍은 사실들로 기억을 꽉 메우지도 않습니다. 그는 즐거운 조화를 이루며 배열된 말을 가지고 당신에게 접근합니다. 이 말들은 매혹적인 음악을 수반하든지, 또는 음악에 맞추도록 쓰인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야기를 가지고 당신에게로 다가옵니다. 어린애로 하여금 놀이를 중단케 하고, 노인으로 하여금 화롯가를 떠나게 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마음을 악에서부터 선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애에게 달콤한 물건에다가 좋은 약을 숨겨서 먹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어린애에게 먹어야 하는 쓴 약의 효험을 이야기해 준다면 어린애는 입으로 보다는 귀로 약을 먹고 마는 셈이 될 것이다.
-시드니, 「시의 변호」, 『문학 이론의 역사적 전개』 (이상섭)
좋은 문학작품을 읽은 독자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작품에 대한 감동적인 교훈적 내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가 문학에서 단순한 즐거움 이외에 실질적으로 무엇인가 얻기를 기대하며 문학을 즐깁니다. 대개는 위대한 사상의 문학에서 위대한 사상을 배우고자 요망합니다. 그러나 문학은 철학이나 과학처럼 체계적인 지식을 주지는 않습니다. 말하자면 사상이나 지식, 또는 교훈 등의 내용이 문학 외적이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게 문학적인 것은 오직 형식만입니다. 문학당의설에서 문학을 형식과 내용으로 구분시켜, 내용은 '씁쓸한 약'이고 형식은 '감초' 같은 것이라고 비유되는 것처럼, 형식에서 오는 즐거움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즐거움은 대개 정확하고도 생동감 있는 표현에서 오는 것으로서 기교의 문제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은 문학적 기교에 의해서 인간에 대한 지식을 불어넣어 주며, 그 기교를 통해서 즐겁게 사람을 가르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문학이 주는 교훈은 일종의 감화 · 감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지침이 되기도 하고, 사랑의 가치 또는 인간성 등에 관한 깨우침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문학은 인간 행위의 윤리적 해석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논의한 것을 정리해 보면, 「문학은 감미로움과 유익함, 즉 즐거움과 교훈의 성질을 갖고 있는데, 문학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며, 또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특별한 그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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