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은 유기적 통일체입니다.
문학이 언어의 특수한 조직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위에 지적한 바 있습니다. 언어의 특수한 조직이란 작품을 이루고 있는 언어들이 하나의 통일체로서 서로 긴밀하게 짜여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작품은 그 작품 속에 동원된 언어들의 덩어리입니다. 아무리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어울려 있다고 해도 그 요소들은 모두 치밀한 내부 조직 속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내포하며 하나의 전체를 위해 기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치밀한 내부 조직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완성된 형상을 우리는 체계 또는 구조(structure)라고 부릅니다.
구조라는 말은 근래 여러 분야에서 널리 쓰이고 있어 (예를 들자면, 권력구조나 의식구조, 사회구조 등) 생소한 말은 아니지만 문학작품을 하나의 언어구조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최근의 경향입니다. 구조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의 총합이므로 조직이라든지 형식이라는 말보다는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조직과 형식은 모두 구조라는 말의 개념 속에 포함되는 한 요소라고 해도 좋은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분들의 구조적 통일은 그들 중 하나라도 위치가 변하든가 제거되었을 때 전체가 흩어지고 교란될 그런 성질의 통일입니다. 있으나마나 마찬가지로 아무런 뚜렷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부분은 전체에 대한 유기적 부분이 되지 못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8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문학의 구조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전체라는 것은 처음. 중간ㆍ 끝이 있는 사물이어서, 잘 짜인 작품이라면 반드시 함부로 시작하거나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크기와 질서에 의존하는 까닭에 부분들의 질서 있는 배열과 일정한 크기가 있어야만 된다고 하였습니다. 위에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문학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전체와 부분의 특수한 관계입니다. 즉 전체 구조를 위한 모든 요소들은 어느 한 부분이라도 위치가 변하거나 제거될 수 없고, 서로서로 유기적으로 연결 지어져 있기 때문에 이들 요소들은 하나의 전체와의 관련에서 다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작품을 분석하거나 느낌을 말할 때 문학의 여러 요소들을 한 부분씩 떼어서 설명합니다. 말소리 • 느낌. 토운 • 운율. 이미지. 수사학적 문체 등이 모두가 문학의 구조상으로 볼 때에는 사실 어느 하나만을 따로 떼어내거나 한 부분만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작품은 이 모든 요소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간단히 헤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부분들을 요령 있게 할 수도 없는 것일뿐더러 이 요소들을 모두 분석한다고 해서 구조 자체가 완전히 해명됐다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문학작품의 구조는 이 요소들의 단순한 총합보다도 크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학작품은 사실 매우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기도 하지만 의미가 깊은 구조를 갖고 있는 작품일수록 그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의 조직 상태도 복잡다단합니다. (A. 프레밍거)
하나의 문학작품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것대로 완결된 형태를 갖고 있기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조감하고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여야만 합니다. 어느 한 쪽에서만 관찰하여서는 전체 구조를 알 도리도 없고 어느 한 부분만 면밀히 파악한다고 해도 전체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작품 하나를 두고서도 이를 하나의 건축물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편의 소설을 하나의 건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둥이 아무리 공고하다 하더라도 지붕의 압력이 너무 크다면 그 건축은 잘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와 지붕의 압력과 내부 공간의 비례가 두루 조화와 균형을 갖추고 있어야 좋은 건축이 되는 것입니다. (김인환, 「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낭만주의 문학시대에는 구조라는 말 대신에 유기적 형태라는 말이 사용되었었다. 문학작품을 “내적인 것, 즉 그것이 발전하면서 내부로부터 스스로 형상화하는 것이며 그 발전의 완성은 바로 그 외부 형식의 완전함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코울리지였습니다. 문학작품을 유기체에 비유한 것은 하나의 작품은 필요한 요소를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불필요한 부분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발달된 생물체의 조직과 같은 것이라고 본 견해입니다. 하나의 생물체는 모든 부분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이른바 유기적 구조를 갖고 있는데, 문학작품도 그 구조를 보면 그 자체로서 완벽한 짜임새를 갖춘 조직체라서 그런 비유가 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학작품은 생물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체는 스스로 생성·발전·쇠퇴. 소멸하는 운명을 갖지만 문학작품은 그렇지 않습니다. 문학작품은 시간과 장소, 또는 대상에 따라 그 내용의 인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문학의 구조는 동적체계, 또는 동적 구조(Dynamic structure)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동적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문학작품은 그림과 달라서 한 순간에 작품의 구조를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통일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그 전체를 드러내 주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체 안에서 서로 작용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검토하여야만 그 구조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한편의 소설 작품은 순차로 진행되는 시간적 운동에다 동시에 중심으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공간적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김인환, 위 글). 소설의 구조는 말하자면 시간적 운동과 공간적 형태가 복합된 것입니다. 우리가 훌륭한 작품을 몇 번이고 읽어도 그때마다 새로운 감명을 받는 것은 어떤 이유에선가요? 그것은 바로 작품을 대하는 인식이나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작품은 바로 위에서 말한 바 동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작품의 구조에는 변함이 없다고 해도 우리의 인식이나 느낌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감명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작가는 언제나 자신이 인상 깊게 받은 대상을 작품의 소재로 삼습니다. 그리고 실제생활이실제 생활이 문학의 재료가 되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때의 실제 생활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작가의 선택에 의해 언어로써 다시 형성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소재(또는 재료)를 되는 대로 늘어놓거나 함부로 뒤섞어 놓는다고 해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좋은 작품은 물론 아니지만 작품 이전의 것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작품은 언제나 작가가 선택한 여러 요소들이 적절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전체를 형성할 때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작품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을 마음대로 삽입할 수도 없지만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자의적으로 삭제하거나 제거해 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줄거리는 비슷하겠지만 작품은 작품의 구조상 영 다른 것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우리들의 머릿속에 비교적 잘 쓰인 단편소설이라고 기억되는 작품을 골라 이들이 어떤 구조 속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이효석 (李孝石)의 「메밀꽃 필 무렵」과 황석영 「삼포가는 길」입니다. 전자는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역사상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작품으로서 그리고 후자는 비교적 오늘에 해당되는 작품으로서, 두 작가가 속해 있는 시대와 작품 경향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두 소설은 다같이 여로(路)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은 '파장(시장)→ 대화→제천', 「삼포가는 길」은 '파장(공사장)→찬샘→감천→삼포'의 경로를 밟아 각각 그들의 이상향에 안주하고자 하는 의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이효석은 여행 도중에 그들의 숨겨둔 행선지를 확인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면 황석영은 처음부터 행선지를 밟혀두고 그곳에 대한 기대와 반응을 제시하는 구조라는 점입니다. 이런 구조의 차이는 결말 처리에서 확연히 다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두 작품은 여러 가지 대조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 조선달, 동이', 「삼포 가는 길」에서의 '영달, 정씨, 백화')은 파장의 뜨내기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의 행동도 일하는 사람들의 '일하는 동안'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휴식의 시간'에 벌어진 사건들입니다. 둘째, 시간적 구조의 유사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대조적인 것이지만 「메밀꽃 필 무렵」은 여름날 오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의 밤이고, 「삼포 가는 길」은 겨울날 아침부터 그날 오후까지의 낮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실질적으로 거론된 시간은 두 작품 모두 작중 인물의 전생에 걸친 것이다. 셋째, 그들은 각각 이상향으로(제천과 삼포) 가기) 위한 여행 구조 형태의 공간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허생원의 제천은 사랑의 안주가 있는 곳이고, 영달의 삼포는 한가로움과 풍요로움의 안주가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피폐한 삶을 보상받고자 합니다.
또한 두 작품은 모두 만나고 헤어지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구조이고, 「삼포 가는 길」은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는 구조다. 전자의 만남은 혈연적 만남이고, 후자는 동류의식의 만남이라는 성질상의 차이는 있어도 이들의 만남은(헤어
짐은) 순수한 휴머니티의 확인이라는 점에서 같은 효과를 얻습니다. 그런데 「삼포가는 길」이 결정적으로 「메밀꽃 필 무렵」과 다른 구조를 갖는 부분이 마지막 결말 부분입니다. 「삼포가는 길」은 마지막 한 장면을 더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장면이 전체의 구조를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검토하여 보겠습니다.
백화를 그녀의 고향으로 보내고 나서 영달이 정씨와 함께 삼포로 가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삼포의 이상향은 한가롭고, 비옥하고,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삼포에 임박했을 때 실지로 밝혀진 모습은 그 반대로 변해 있었습니다. 삼포는 붐비고 각박한 현실 그대로였습니다. 영달은 결국 이상향을 잃고만 셈이었습니다. 각박한 삶의 현장을 떠나 이상향을 찾아가던 영달은 결국 달아나고 싶었던 현실 속에 그대로 서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립던 고향을 다시 타향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세태의 변화, 이 점이 바로 이 소설의 끝에서 작가가 노린 의도요, 「메밀꽃 필 무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에서 오는 효과인 것입니다.
이처럼 잘 쓰인 작품은 그 나름대로의 세부 요소와 장면과 일화와 그런 것들이 구조적으로 잘 조화되어 있다는 말도 됩니다. 흔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주제라고 말할 때, 현대 작품일수록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한 줄로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고 전체의 구조 안에 용해시켜 버립니다. 때문에 우리는 작품의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학을 구조로써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문학을 형식과 내용으로 나누려는 논의가 무의미함을 해소시킵니다. 하나의 완전한 구조는 형색과 내용을 나누어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용을 떠난 형식도 없지만 형식을 떠나서 내용만으로 독립하는 작품도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 예이츠가 "무용가를 무용에서 어떻게 구별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을 때 무용과 무용가의 동작은 결국 같은 구조 속에 있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우리가 문학을 논의할 때마다 형식과 내용의 두 가지로 나누는 버릇은 잘못된 견해라기보다는 해석이나 설명에 따른 편의상의 문제에 불과한 것입니다. 형식과 내용의 동일성에 대해서 맆스(Th. Lipps)도 이 둘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으며, 최재서도 그의 『문학원론』『문학 원론』에서 형식과 내용의 통일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작가는 내용과 형식을 따로따로 생각해 가지고 두 부분을 합쳐서 작품을 만들지 않으며, 또 독자들도 내용을 이해하고 형식을 자각한 뒤에 두 부분을 합쳐서 감상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내용과 형식은 동일한 창작정신 내부에서 동시에 잉태되어 유기적으로 서로 융합하면서 전일적인 작품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품을 읽을 때에 형식 속에서 내용을 체험하고 내용을 통해서 형식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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