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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문학은 왜, 누구를 위해 쓰는가?

by 소풍같은 날 2022.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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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매우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상이한 문학관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이 왜, 어떻게 자기를 표현하는가라는 문학 또는 예술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에 의해 제기된 모방충동설과 유희본능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문학의 기원에 관한 논의는 대개 희망과 추측일 뿐이어서 자칫 공소한 허구의 논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언어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언어의 기원에 대한 논의를 학문적인 대상으로 삼지 않을 것을 강령으로 채택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문학은 왜 하는가요? 라는 문제를 논의로 삼는 것은 다만 문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스스로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답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왜 쓰는가요?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요?’ 입니다. 그에 의하면 쓴다는 것은 하나의 대상을 창조하는 것인 바, 작품이란 탄약을 잰 권총이므로 이미 창작이 곧 행동임을 알고 있는 작가는 쏠 것을 택한 이상 정곡을 겨누어 쏘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작가는 어린애처럼 쏘는 재미로만 쏘아서는 안 되며, 어린애는 눈을 감고 되는대로 쏘지만 작가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흔히 문학이 작가의 내부정신에서 응어리져서 나오는 현상인 바, 문학작품은 모두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개성과 감정과 사상을 가진 작가의 유출물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감정과 사상이 넘쳐서 흘러나온 것이 문학이라는 것인데, 이는 누구에게나 어느 때나 주어지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원한다고해서 아무 때나 쓴 것이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 쓰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각양각색이다. 설사 쓰지 않을 수 없으니까, 또는 쓰는 게 즐거우니까 라고 대답했다고 해서 틀린 경우라고 말할 수 는 없습니다.

 

피에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것은 자신의 실연의 괴로움을 씻어버리기 위함이었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위로받고 영혼의 아픔을 달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우리의 삶을 좀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또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쓸 수도 있으며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주체적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를 위하여 쓴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글 쓴다는 행위는(혹은 문학을 한다는 일은) 어떤 일정한 삶의 방식이나 양상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 추구하고 획득해 온 질서 위에 또 다른 삶의 방식을, 또는 인생의 해석을 새롭게 경험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학은 당연히 있어온 기성의 질서나 삶의 방식에는 관심이 적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있어 주기를 바라는 희망의 세계, 가능의 세계에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지금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 무엇인가 기여하고자 하는 작가의 소망이 내포된 것이기도 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사르트르는 생산적 피해계급을 위하여 필봉을 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물론 작가 자신의 자유를 순화하기 위해서도 글을 씁니다. 그러나 지금껏 작가는 비생산적인 부르주아지를 상대로 비밀이야기를 털어 놓았으므로 생산적인 계급을 위해 글을 써야 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순전히 파괴만을 일삼는 사이비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님을 사르트르는 강조했습니다. 사르트르가 제시한 문학의 목적은 사람들의 자유에 호소하고, 인간적자유의 지배를 실현하며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사르트르는 문학의 사회봉사 내지 현실참여를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이는 토마스 만의 예술지상주의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토마스 만은 예술은 새롭게 발견된 개인적인 가벼운 웃음으로 이루어지며 오락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술가와 사회라고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예술가에게는 낭만기질이 있는데, 이 기질은 심리적으로 '사회적 반칙'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토마스 만은 예술작품은 도덕적 효과가 있지만, 예술가에게 도덕적인 목적을 요구하는 것은 예술가로 하여금 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면서, “예술가의 임무는 생기를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토마스 만의 문학관의 중심은 작품에 도덕적인 목적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과 또 다른 목적의식, 이를테면 현실고발 내지 허무주의적 삶의 제시 같은 것을 요구할 수 없다는 순수한 예술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술지상주의는 예술의 사회봉사를 주장하는 톨스토이의 주장과는 대조적입니다. 톨스토이는 도덕을 희생시키는 예술을 전면 부정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실로 우리의 사회는 재판. 경찰 자선사업. 공장검열 등 외적 수단에 의하여 보존되어 나가고 있으나 각자의 인격과 여러 생물의 존엄성을 환기시키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스럽게 즐거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시키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예술작품이 상류 계급의 인사만을 도취시키고, 부유한 사람들만을 위한 위안물로서 계속 존재하는 것을 크게 경고하였습니다. 그는 예술이 인간의 발달과 교양의 단계와는 관계없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참된 예술은 학식은 있으나 종교심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박하고 타락되지 않은 민중의 노동자에게는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예술관이었습니다. 이 예술관은 사르트르로 하여금 작가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강조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위에서 사르트르는 산문적 언어활동을 일종의 세계개혁의 행위로 보았을 때 이러한 그의 견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자신이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자유가 귀중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바로 문학의 쓰임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견해는 일면 사회주의 이론에서 발견되는 이론입니다. 예컨대 그의 작품에서는 사회의 여러 계층 사이의 갈등이나 알력이 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주의 경향의 문학입니다. 오늘날 문학 생산자의 경제적인 조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작품이 경제적인 면에서 어떠한 효용을 발휘하는가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도외시하거나 그들의 주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문학의 독자성 개별성을 간과하여서도 안 될 것이며, 서로 다른 관념에 의하여 문학의 효능이 바뀌어 진다거나 결정되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작가가 글을 쓴다는 행위는 일종의 '반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작가가 선택한 대상은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도전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으며, 작가는 그 도전에 대하여 언어예술이란 방법이로 반항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문학이란 작가가 도전의 대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일 따름입니다. 그 반항의 대상은 실로 다양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문제일 수도 있고, 사랑의 아름다움이나 슬픔. 인간의 운명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현실이나 역사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그 의미의 폭은 좁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띨 경우 이 반항은 현실참여라는 말로 대치 할 수도 있습니다.

 

문학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직접적인 행동을 유발시키지는 않습니다. 직접적 행동을 유발시키는 것은 선전광고나 선동 선정의 웅변이거나 구호인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문학이 사회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한 적은 없습니다. 풍자문학이 사회의 부조리를 우스꽝스럽게 제시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부조리를 범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지만, 풍자문학이 있음으로 해서 사회의 부조리가 사라진 적은 없었습니다. 사회개혁이나 정치개혁을 위해서라면 문학은 그야말로 효용성이 희박한 것입니다. 문학의 진정한 사회참여란 행동의 직접적인 유발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상태의 개조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한 사회, 한 나라의 문화의 세련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상태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문학을 하나의 창조적 행위의 결정이라고 말해야 할 경우,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치의 영속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위대한 작품은 시대와 장소, 상황을 초월하는 게 보통입니다. 곧 문학은 영원한 가치의 추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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