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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문학의 언어성

by 소풍같은 날 2022.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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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언어로 되어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오래전부터 있어서 왔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미 수많은 논저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한 수많은 답은 문학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명쾌한 해답을 내려 주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의문과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곤 하였던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말하자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혹은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만큼이나 명쾌하게 설명하기에는 어렵고 복잡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문학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완전무결하게 만족할만한 대답을 찾아보겠다고 하는 시도가 어리석은 짓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록 완전한 해답을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대강의 윤곽이라도 잡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윤곽을 그리는 일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인가요? 우리가 인간의 삶에 대하여 '삶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삶을 다 살아보고 난 뒤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 살아 보지 않고서도 삶의 의미라든지 가치나 보람 등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삶에 대하여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우리들 자신의 삶을 설계하듯이,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완전하게 이해함이 없이도 정의를 내리기도 하고 또 문학을 즐기기도 하면서 문학의 가치 기능. 존재 양식 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정된 경험을 토대로 우리의 삶에 대하여 나름의 근사한 윤곽을 그리기도 하고, 삶을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문학에 대해서 한정된 경험을 토대로 어느 정도 근사한 윤곽을 그려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처음의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질문의 양식을 바꾸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문학이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문학의 재료는 무엇인가? 물론 이와 같은 질문이 문학을 다 포섭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문학이라는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를 설명해 줄 뿐입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기왕에 있었던 단답형 식의 대답 중에는 문학의 뜻을 아주 넓게 해석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니 모든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좀 더 의미의 폭을 줄여서 대답한 것 중에는 '정서적 표현의 예술'이니 '가치 있는 인간적 체험의 기록'이니 하는 답들이 있었습니다. 문학이라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애매하고 모호하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대답 가운데서 가장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문학의 출발점이 언어로 되어 있는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문학이 언어로 되어 있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문학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문학이 언어로 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고 표현하는 인간 정신의 한 양상이라고 말할 때에도 언어를 매체로 한다는 특징적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술의 갈래에서 문학의 재료가 언어라는 사실은 음악의 재료가 소리이며 회화의 재료가 선과 색채이고 조각의 재료가 나무나 돌, 구리 등인 것과 같습니다. 언어를 떠나서 문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언어로써만 가능한 것이 문학입니다. 그런데 문학의 본질을 밝히는 자리에서 르네 웰렌 (René Welleck)이 이미 지적했듯이 음악이나 조각, 회화에 사용되는 재료와는 달리 문학에 사용되는 언어는 그 자체가 인간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집단(이를 언어집단이라고 말합니다)의 역사와 문화의 변화에 상응하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따라서 언어는 독특한 문화적 전통 또는 문화적 유산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르네 웰렉은 언어를 일상 언어와 문학 언어로 구분하였고, 사르트르는 문학 언어를 다시 구분하여 사물로 간주하는 시적 언어와 기호로 간주하는 산문적 언어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언어란 말하자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특징져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를 매체로 하는 인간정신의 표현은 문학 이외에도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 역사가 그런 것입니다. 역사와 문학은 뒤에 다시 거론되겠지만 역사는 언뜻 문학과 구별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역사 이외에도 우리는 도저히 문학의 범주 속에 넣을 수는 없는 것으로 법전이나 철학·수학 자연과학과 같은 학문도 언어를 매체로 하고 있는 인간 정신의 소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언어를 매체로 하면서 무엇이 이들과 문학을 다르게 구별 짓게 하는가요? 여기에서 우리는 문학에 사용되고 있는 언어가 법률이나 과학 논문에서 쓰이고 있는 언어와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사용되고 있는 언어가 별개의 것일 수는 없습니다. 동일한 언어라도 그 사용하는 태도에 따라서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언어라고 판별하는 것입니다. 언어의 사용 방법 여하에 따라 문학이 될 수도 있고 문학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면, 언어의 사용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언어는 그 용법에 있어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일상적 사용, 과학적 사용, 문학적 사용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서정주의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즈문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라는 (서정주의 동천)시를 읽고 이 글에 나타나 있는 세계가 과학적 세계와는 모순되므로 거짓 진술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위 시는 결코 기술적 (記述的)인 것은 아니지만 거짓은 아닙니다. 위 글에서 당혹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언어의 과학적 사용에서 벗어난 태도 때문입니다. 언어의 과학적 사용에 있어서는 어떤 사실에 대해 순수하게 기호로서 표시될 수 있을때 가장 바람직합니다. 이는 언어라는 기호(sign)와 언어가 표시하는 대상물(referent)과의 사이에 11의 대응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언어는 오직 그 사물 하나만을 지칭하는 것이어야 하며 다른 뜻이 첨가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수학에 사용되는 숫자는 보편적 기호로서 가장 성공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말을 썼을 때 적어도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일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설령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1+1=2>라는 세계 공통의 기호를 쓰면 위에서와 똑같은 사실을 그대로 알게 됩니다. 이처럼 언어라는 것은 하나의 기호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단순한 약속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명백하게 다른 뜻이 전혀 부가됨이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의미로 사실을 전달되도록 하는 언어의 사용법이 바로 언어의 과학적 사용입니다. 이는 언어의 외연 (denotation)으로 '말의 표시적 사용'이라 할 수 있다.

 

언어를 표시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것으로는 논리학이나 수학·과학 논문을 비롯하여 국어사전. 법조문. 영수증. 조서. 신문기사 따위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쓰이는 언어는 그 형식이 일정하고 그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단일적입니다. 이 때의 언어는 실용성을 획득하는데, 그것은 가장 적은 표현으로 최대한으로 정확한 단하나의 의미만을 전달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예문을 보겠습니다.

 

: 명 초본 식물의 총칭. 때로는 지상경이 5m에 이르는 것도 있으나 목질(木質)의 발달이 불량하여 줄기는 연합. 1년생, 2년생, 다년생의 구별이 있음

: 명 공중의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땅 위로 내려오는, 희고 여섯 모가 진 결정체.

 

이것은 어느 국어사전에 정의된 '()''()'에 대한 과학적 진술입니다. 사물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동원된 언어들은 하나같이 무미건조합니다. 그렇지만 그 무미건조함은 언어가 기호로써 쓰이고 있는 본래의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은 어떤가요?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김수영의 중에서)

 

눈이 내린다. 눈이 날린다./눈이 쌓인다./눈 속에 태고가 있다./

속에 오막살이가 있다./ 눈 속에 내 어린 시절이 있다.

(김동명의 중에서)

 

이 글을 보면 어떤 사물에 새로운 의미가 첨가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나 ''에 대해 보통 사람이라면 인정하고 수긍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던 어떤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는 그 사물에 본래부터 숨겨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전에는 기록할 수 없는 것을 시인이 발견해 낸 특수한 의미인 것입니다. 사전에는 정의할 수 없는 것은 이 의미가 과학적이거나 보편적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의 의미는 단지 그 한번, 그 글속에서만 통할 뿐입니다. 이를 문학적 언어 사용이라 합니다. 그렇다고 문학이라는 글 속에 사용되고 있는 문학적 언어가 모두 새로운 의미를 갖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상당한 양의 언어의 '표시적 사용'도 있음은 물론입니다.

 

문학은 확실히 과학적이거나 학술적 서술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와는 달리 특수하고 개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 사용을 의식적으로 추구합니다. 위의 예에서처럼 한 마디 말에다 여러 의미를 한꺼번에 포함시키려는 말의 사용법을 내연 (connotation), 즉 말의 함축적 사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의 언어는 함축적이며 주관적입니다. 언어의 함축적 사용이 최대한으로 활용되었을 때 흔히 시적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위의 시에서 김수영이 발견하여 새로운 의미를 주고 있는 ''은 세상에 있는 생물 중에서 가장 흔한 것으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목숨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질긴 생명력을 지닌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일부러 가꾸려 하지 않아도 여기저기에서 잘 자라나고 없애려고 해도 그렇게 쉽사리 없어지지 않습니다. 풀이 갖고 있는 이러한 속성 때문에 김수영은 풀에 대해서 세상에 무수히 있으면서 어떤 시련에도 견디어내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를 첨가시킵니다.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억누르는 어떤 힘으로 이해됩니다. 풀은 바람과 끈질긴 싸움을 되풀이 합니다. 언뜻 바람이 풀을 완전히 억누르고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바람이 가고 나면 풀은 곧 일어나 자신을 되찾습니다. 바람이 부는 순간에도 풀은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처절한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김수영이 그리고 있는 풀은 말하자면 국어사전에 정의되어 있는 그러한 목질성(木質性)이 약한 사물이 아니라 세상에 무수히 있는 굳센 생명들이며, 바람은 그것을 일시적으로 억누르고 괴롭히는 힘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위 글을 읽으며 잘못되어 있는 진술이라고 하기보다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억세고 질긴 삶을 지켜온 민중과 그들을 일시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사회세력과의 어면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일상적 언어 사용에서는 말의 '표시적 사용'은 물론 '함축적 사용'도 합니다. 우리가 기억력이 나쁜 사람을 '돌대가리'라고 지칭했을 때,ㅍ이는 '돌대가리'란 말의 과학적 의미의 확대이거나 첨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의 '돌대가리' 말은 특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언어의 함축적 사용의 예인 것이다. 이처럼 일상적 언어생활에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표시적 언어와 함축적 언어를 혼합하여 사용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의식적으로 함축적인 언어만을 사용하기를 고집한다거나 그 반대로 표시적 언어만을 사용하려 든다면 정상적인 언어생활을 못할 것은 자명합니다. 예를 들어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은 언어의 과학적 사용인가요? 아님 문학적 사용인가요? 이 말은 원래 문법적 구조로만 따진다면 맞는 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낮이나 밤이 말을 할리도 없거니와 새나 쥐가 그 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날 우리 할머니들은 "입조심해라" 또는 "말조심해라"는 뜻으로 그 말을 즐겨 써 왔고, 우리는 또한 그 말을 생명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느덧 일상적 언어가 된 것입니다.

 

문학적 언어의 특징은 한 마디로 '개념적 의미? (표시적 의미)보다 '내포적 의미' (함축적 의미)를 더 중요시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학은 객관적 진리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사용되는 언어는 함축적이어야 보다 감동적인 힘을 지니게 됩니다. 문학의 언어는 언제나 무한한 함축적 의미를 지향하는 성질을 갖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문학적 장치(Literary device) 인데, 은유라든지 상징 반어·역설 등이 바로 그러한 장치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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