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세계는 허구의 세계입니다. 시나 소설. 희곡 등을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를 때 시나 소설. 희곡 등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세계는 모두 작가가 꾸며낸 세계인 것입니다. 허구(Fiction)라는 말은 여러 가지의 중복되는 용법을 지닌 복합적인 용어로서 소설 (novel)이라는 말과 유사어로 자주 쓰이고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 말입니다. Fiction이라는 말은 라틴어 fingo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형성하다', '만들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fiction 즉 허구라는 말은 상상력이라는 행위 그 자체를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사실 소설을 뜻하는 novel은 장르 개념이지만 Fiction은 그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문학의 세계가 허구라는 말은 문학은 모방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모방이란 무엇인가요? 무엇을 모방하는가. 우주라든가, 삼라만상, 인간의 경험 외부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행위나 내면까지도 그대로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지로 그대로는 아닙니다. 대상과 모방은 연못과 구름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구름은 연못의 물이 증발해서 엉킨 덩어리지만 그러나 연못은 아닙니다. 연못이 대상이라면 구름은 그 연못을 모방한 문학작품과 같은 것입니다. 문학예술의 기원설을 논하는 학자들은 문학예술의 기원을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찾기도 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모방충동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오랜 동안 기원설의 중요한 내용으로 인정되어 오기도 하였습니다. '모방'이라는 말은 그리이스어 미메시스(mimésis)에서 나온 말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쓰이기 시작한 용어였습니다. 플라톤은 극이나 시를 mimésis, 즉 모방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견해는 그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모방은 인간에게 있어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는 것이며, 또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모방을 잘하는 동물로써, 처음에는 이 모방에 의하여 배운다”라고 주장하였는데 그러한 본능이 예술을 낳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견해입니다. 이것이 기원전 4세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론의 근간이 되고 있는 '모방설'입니다. 문학 모방설은 말하자면 문학을 문학 밖의 세계와의 관련에서 규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문학은 어디나 '흉내낸 것'이므로 실재와 진리에서 먼 것으로서, '순수이성'을 구사하여 실재와 진리를 파악한 철학자가 지배하는 공화국이 이룩되면 시인은 쓸데없는 존재가 되므로 추방하겠다는 이른바 '시인추방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달랐습니다. 그는 문학이 인생을 모방하는데 특수한 면만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타당성 있는 면을 모방하는 것이므로 진리를 제시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보편성에서도 철학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을 구별하였는데, 특히 문학적 보편성을 '개연성' (probability)이라는 말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는 이 개연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역사와 문학을 구별하기도 하였는데 역사는 특수한 사실의 기록으로 끝나지만 문학은 특수한 사실을 통하여 '개연적 진실' (probability)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작가가 모방하는 세계는 개연성 있는 보편타당성을 가진 세계입니다.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실재의 세계와 상당히 닮았다든가 실재와 전혀 닮지 않았다 해도 위에서 말한 개연성을 부각시킨다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그 허구성은 일정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개연성이 있다'라는 말은 무엇인가요? 개연성이란 사실 그대로가 아닌 '있음직한' 것입니다. 우리의 소설에서 우리는 현실적 세계가 아니면서 현실적 세계와 비슷한 세계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실지로 존재하는 세계는 아니지만 그러나 실제 세계가 있기 때문에 존재 가능한 세계입니다. 이 점은 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은 그러니까 현실을 통해서 현실과는 유리된 또 하나의 언어 공간을 만드는 일입니다. 실재와 전혀 닮지 않았다고 해서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학적 진실은 과학이나 역사처럼 실재 사실과의 합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 자체가 그럴 듯하면 되는 것이 바로 허구인 것입니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실에 있지도 않았던 일들을 마치 있었던 일이나, 있는 것처럼 꾸미는 기능이 바로 문학의 개연성입니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역사와 많이 닮아 있지만 역사와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똑같은 사건이 재발할 수 없는 일회적 성격을 갖습니다. 한 특정한 시대와 배경 속에 사회와 인물을 등장시킨다는 점만 놓고 보면 역사와 문학은 구별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있었던 일 (What was)만을 기록합니다. 있을 법한 일(What might be)을 기록하는 것은 문학입니다. 가령,
한산섬 앞바다에 싸움이 있던 날 이순신은 아침 상에서 반주를 한 잔 했
고, 콩나물 무침에 보리가 반쯤 섞인 밥을 맛있게 비벼 먹었다.
이런 내용은 어느 역사책에도 씌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내용이 씌어있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닙니다. 역사가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한산섬 앞바다에서 왜적과 큰 싸움이 있었다는 것과 그 싸움을 이순신이 이끌어 승리했다는 진술일 뿐입니다. 그러나 위의 진술이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진실이기도 한 것은 이순신의 그날아침 밥상이 보편성을 기초로 하여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한산섬의 승리는 역사적 진실이지만 그날 아침 밥상은 문학적 진실인 것이다. 이처럼 문학과 역사는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그것을 그리는 시각은 다르다. 『무정』에 나오는 이형식이나 『삼대』의 조덕기는 모두 일제 강점기라는 일정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곧 현실세계를 사는 실존적 인물은 아닙니다. 그들은 허구의 세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형식의 자손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를 생각한다거나 조덕기의 동경 유학 시절의 성적표를 열람해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읽고 "떠나는 님을 위해 꽃을 뿌리는" 인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겠다고 김소월의 여성관계를 조사해 보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산의 동대(東臺)'에 올라 실제 조사해 보니 그 산에는 진달래꽃은 없고 철쭉꽃만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하여 이 시는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학은 사실 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나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그 세계는 실제 세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허구세계는 실제 세계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지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와 같은 문학의 허구성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은 위에서 말한 문학의 개연성입니다. 보편적 성격이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는 이 용어는 또한 하나의 전형 (type)을 이루는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가령 우리가 『춘향전』이라는 작품을 읽을 때에 우리가 만나게 되는 인물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 중에 우리나라의 열녀는 이런 여자로구나 생각되는 인물이 춘향이며, 당대의 탐관오리라면 변학도가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이는 인물의 전형입니다. 『콩쥐팥쥐』라는 고대소설 속에는 계모의 전형이 들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는 우유부단하고 갈팡질팡하면서 고민하는 한 인물을 만나며, 세르반테스의 『동키호테』에서는 저돌적이며 경박한 한 사내를 만납니다.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조차 '그 여자는 춘향이 같다' 느니, '변학도 같은 놈'이라는 등의 말을 사용합니다. 이때의 춘향이나 변학도는 바로 그런 인물의 전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형은 인물뿐만 아니라 사건이나 배경 등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염상섭의 소설 『삼대』는 일제 식민지시대의 한국의 현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소설 속에서 만나는 현실은 실제가 아닌 하나의 전형인 것입니다. 『삼대』에 나타난 현실은 우리가 똑같이 체험할 수는 없는 것이며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교육이나 사회교육 등을 통한 경험의 귀납과 반복적이며 연속적으로 누적된 이미지를 통해 상상력을 발휘하여 당대의 사회상을 선명하게 그려볼 수는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그려보는 선명한 사회상이 바로 당대 현실의 한 전형인 것입니다. 이러한 전형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보편적인 성찰에 이르도록 해 줍니다.
작가가 꾸며내는 이러한 전형이야말로 특히 문학이라는 분야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하나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가령, 어떤 소설을 읽을 때, 그 소설의 주인공이 실제 생활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영웅이거나 또는 초인적 삶을 살아가는 특출한 인물임에도 우리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아가 그런 인물을 긍정하고 동감하고 또 때로는 그로부터 감화나 감명을 받기도 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삶과 전혀 동일하지 않고, 사실적이 아니더라도 소설을 읽을 때, 마치 실재한 것처럼 느끼며 때로는 그 인물들과 일종의 연대감까지 갖게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요? 그것은 인물의 전형이 보여주는 인생입니다. 이때 인생이란 초인이나 영웅이나 혹은 걸출한 인물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할 당위의 인생인 것입니다. 당위의 인생이란 무엇인가요?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바람직한' 혹은 '이상화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작품은 언제나 의미 있는 허구로 짜여 있는 것이므로 우리의 일상 체험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가치하거나 소위 허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진실성이란 우리의 일상적인 체험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습니다. 인생이란 말 그 자체가 일상생활의 다양하고도 특별한 체험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문학작품에서 추구하는 진실성이란 다만 '어떻게 있어야만 하는가?'의 당위적인 인생에 대한 진실입니다
문학적 허구는 비록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실을 다루었다고 해도 만인에게 이해됩니다. 우리가 『돈키호테』를 읽고 나서, 돈키호테라는 인물이 전혀 새로운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우리는 사람의 어떤 전형을 발견하게 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학에서 묘사하는 구체적인 세계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서정시에 나타나 있는 슬픔이나 사랑 • 분노· 증오의 감정까지도 한 인간의 특수한 감정을 노래한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 감정이라는 설득을 얻게 될 때에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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