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기능은 비평 그 자체의 정의와 더불어 생각되어야 합니다. 비평의 기능을 창조적이며 독자적인 것으로 볼 때, 비평은 다른 문학 양식과 동등한 것이 됩니다. 그 극단적인 예를 우리는 와일드 (O. Wilde)나 머리(J. M. Murry) 등의 창조비평을 통해서 볼 수 있으나, 이들의 관점은 비평의 독자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예에 속합니다. 보편적인 견지에서 볼 때 비평의 기능은 문학작품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허드슨(W. H. Hudson)은 그의 『문학연구입문』(An Introduction to theStudy of Literature, 1958)에서
비평에는 두 개의 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해석과 판단이 그것입니다. 실제에 있어서 오늘날까지 이 두 개의 기능이 혼합되어 쓰여 왔습니다. 곧 여러 비평가가 판단을 비평의 참된 목적이라 생각하는 동시에 이 목적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해석하여 왔습니다.
고 말하면서, 비평가의 주된 임무는 판단보다는 해석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비평의 기능에서 문제 되어온 것은 해석보다는 판단에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20년대 김동인(金東仁)과 염상섭(廉想涉)이 제기한 비평의 기능에 대한 논쟁은 이런 문제점을 부각한 것입니다. 김동인은 "가장 공평한 눈으로 공정하게” 작품을 평해야 된다고 하였으며, 비평가를 활동사진의 변사에 비교하여 비평의 해설적 기능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염상섭은 비평가는 작가를 지도하는 재판관 같다는 논점을 주장하였습니다. 작가 절대 우위의 관점을 주장한 김동인이 뒤에 『춘원연구』(1935)를 쓰고, 비평의 지도적 위치를 강조한 염상섭이 소설가로 변신한 것은 이들의 비평적 기능에 대한 관점의 상반된 견해가 전도된 양상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음미해 볼 만합니다.
비평의 매개적 역할은 아널드(M. Arnold)에 의해 보다 분명히 논의되었다. 그는 『현 단계에 있어서의 비평의 기능』 (The Function of Criticism at the Present Time, 1865)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평은 내가 말한 대로 이 세상에서 알려지고 사고되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배우려고 하는 일이며, 나아가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파시킴으로써 진실하고 신선한 사상의 물결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아놀드는 낙관적 진보주의자였으며, 정치와 종교를 떠나서 자유로운 정신에 의해 "진실하고도 신선한 사상의 물결을” 창조하는 것이 비평의 기능인 동시에 목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비평의 중개적이며 전파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창조적 기능까지도 인정하였습니다. 아놀드의 이러한 관점은 19세기 후반 영국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으로부터 마련된 것이겠지만, 시대의 문명·문화의 조건에서 정신의 자유를 주장했다는 점은 오늘날에 와서도 참고할 바가 많습니다. 그는 문학이 지적 소산이며 그 주된 노력은 비평적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이런 관점이 절대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어렵겠지만, 비평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적입니다.
비평의 기능을 그것이 목표로 하는 대상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 두 가지 면에서 논의될 수 있습니다. 우선 비평이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와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에 앞서는 전제적인 작업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단계가 필요하지만, 비평의 최종적인 목표는 작가나 독자 그 어느 쪽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비평이 작자를 향할 때, 그 내용은 대체로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을 써서는 안 되는가 등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지도적이며 원리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92)은 그의 「동인시화서(東人詩話序)」「동인 시화서(東人詩話序)」에서 시와 비평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시에는 6의(義)가 있으니 진실로 시문에 깃들어 있는 뜻을 깊이 살필 수 있다면 자못 작자의 의도를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가 어찌해서 비평가의 평가를 기다려야 되며, 또 시에 대한 비평이 그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대개 시가 정당한 비평을 외면하고서는 그 속에 지니고 있는 잘못된 점을 불식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의술(醫術)에 있어서 적절한 약의 처방을 마다하는 환자가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여섯 가지 뜻은 風, 賦, 比, 興, 雅, 頌 등을 말하는데, 풍, 아, 송 등은 시의 형태를, 부, 비, 홍 등은 시의 뜻을 나타냅니다. 서거정은 시의 형식과 내용 두 가지 면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양면에 걸쳐 작품 자체를 논평한 것은 일반 독자를 위한 해설적 기능보다는 시인에게 작품을 쓰는 제작상의 문제를 원리적으로 제시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시기적으로 보아 대부분 고전적 비평론들은 창작의 지도 원리와 같은 것을 다루고자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 당시 독자층이 제한되며, 독자는 곧 시인이나 작가였다는 등식이 오늘날보다는 더 밀접히 결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작품 제작상의 문제를 중요시하였다고도 생각됩니다. 현대와 같이 독자층이 확산되고 작품의형식도 다양해진 시대에 있어서 독자를 향한 비평의 해설적 기능은 중요한 의의를 갖습니다. 이런 점에서 판단보다는 해석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현대 비평의 경향도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엘리어트는 그의 「비평의 기능」(The Function of Criticism, 1923)에서 "비평적 활동은 예술가의 노력 속에 잠재하는 창조적인 것과 일종의 결합을 함으로써 진정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고. 보았으며, 비평가의 해석은 그것이 아니면 독자들이 간과하게 될 사실들을 지적하게 될 때 그 해석의 정당성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비평의 목적을 "예술작품의 해명과 취미의 시정”이라고 보았다. 그는 다시 3030여 년 후에 쓴 「비평의 한계」 (The Frontiers of Criticism, 1956) 문구를 “문학의 이해와 향유를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바꾸어 말하였습니다. 이 향유(enjoyment)라는 용어 속에는 다분히 시대적 감각이 스며 있는데, 분명한 것은 그가 비평의 기능이나 목적을 독자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엘리엇은 작품을 쓰는 한 작가의 노력 대부분이 비평적인 노력 (정선하고 결합하고 구성하고 삭제하고 수정하고 음미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신이 작품 창작상에 부딪친 문제를 비평문으로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된 장르로서 구체화된 비평의 기능과 목적은 작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독자를 향한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작품과 독자의 관계에서 우리는 각계각층의 독자를 예상할 수 있고, 또 각양각색의 가치관이나 교양의 수준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작품 자체의 다양한 질적 수준이나 의의를 연상할 수도 있습니다. 비평은 근원적으로 작가의 창조적 노력을 엘리엇이 말한 비평적 노력으로 중개하면서 독자에게 작용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잘못된 비평은 독자를 오도하고, 작품과 독자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작품을 보지 못하고, 비평가의 해설에만 의존할 때 우리는 작품 그 자체에 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건전하고 사려 깊은 비평이 존재해 왔고, 비평을 거부하는 것은 자아도취적 발상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문학을 이해하고 향유하는 일을 증진한다는 엘리어트의 표현 속에는 분명히 비평이 삶의 풍요로움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도 큰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비공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0) | 2022.07.16 |
---|---|
문학의 비평 – 역사주의 비평 (0) | 2022.07.15 |
비평 방법의 분류 (0) | 2022.07.14 |
비평의 갈래 (0) | 2022.07.13 |
비평의 정의 (0) | 2022.07.11 |
문학은 인간의 주체적인 질문형식입니다 (0) | 2022.07.10 |
문학의 유기적 통일성 (0) | 2022.07.09 |
문학은 왜, 누구를 위해 쓰는가? (0) | 2022.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