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과 언어
앞에서 말한 「문학적 현실」의 중심에는 언어가 놓여 있습니다. 화가는 선으로 예술적 표현을 하고, 음악가는 음으로 예술적 표현을 하는 데 대해서 시인. 작가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문학예술의 매체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언어는 화가의 선이나 음악가의 음처럼 직접성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성과 사회성을 띠고 있으므로 그리 간단히 얘기될 수 없습니다. 웰렉 (René wellek)은 언어를 과학언어, 문학언어, 일상언어의 세 범주로 나누면서 과학언어가 외연 (外延)의 언어임에 반하여 문학언어의 가장 큰 특성은 내포(內包)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과학언어는 기호와 그것의 대상과의 1대1의 상응관계를 목표로 하며 또 그러한 목표를 쉽사리 달성할 수 있는 보편적 언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언어는 역사적 사건, 기억, 연상들로 가득한 고도의 내포적인 언어인 것입니다. 또한 문학언어와 일상언어의 구분은 보다 애매하나 하나의 기준은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문학언어는 개성적인 언어이며, 특히 시적 언어들은 역설(逆說), 애매모호성, 의미의 문맥상 변화 등을 사용함으로써 일상언어의 파괴를 통해 일상언어와 구분되는 예술적 구조를 이룩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문학의 언어가 특수한 범주의 언어, 또는 언어를 '특별히' 사용한다는 사실은 대체로 합의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언어의 특수성에 대해서도 이글턴 (Terry Eagleton)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언어의 형식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특수한 문학언어 특히 시적 언어, 또는 하나의 규범적 언어가 있다는 사실과 그 생각에 대해서 의문 제기합니다. 즉 어떤 계층에게 특수한 언어로 생각되는 언어는 다른 계층에게는 그렇지 않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수한 언어의 논리는 문학을 특수화하려는 '부르주아적 작가의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언어는 특히 대중성의 언어(일상언어)에 의한 생활의 반영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어떤 단정적 해답으로 문학언어를 특정 지으려는 시도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위에서도 보아왔듯이, 언어에 대한 일정한 태도는 을 그 어떤 에 감금시키게 됩니다. 예컨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는 그것을 수단으로, 형식주의를 비롯한 신비평적 관점에서는 그것을 목적으로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 언어의 특수성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진정한 「문학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문학의 언어는 「진정성」과 한 편의 작품 속에서의 '필연성을 지녀야 합니다. 진정성과 필연성의 언어가 숨쉬는 문학은 독자가 되는 인간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2. 문학과 체험
우리는 체험의 바다에 떠 있는 존재들입니다. 멀리서 보는 바다는 언제나 거의 같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조금 가까이 그 바다로 눈을 들여다보십시오. 바다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습니다. 바람결에 따라서 파도는 그 포효의 높이를 끊임없이 다르게 하고 있으며, 물결 밑에서 물고기들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다'라는 한 커다란 자연물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더 주의하고 싶은 것은 파도의 모습입니다. 한 파도는 결코 저 혼자 오지 않습니다. 한 파도는 무수한 다른 파도를 자기의 뒤에 거느리고 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기의 뒤에 물거품을 일으켜, 마치 물거품의 집적이 한 바다를 이루는 듯한 착각까지도 줍니다. 그러나 그 물거품의 행진은 '한 큰 바다'의 몸 속에서 그럴 뿐입니다. 파도들의 끊임없는 운동은 '바다'라는 하나의 큰 그릇 속에서만 유효할 뿐입니다. 우리의 체험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하나의 체험은 수많은 다른 체험들과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보이지 않게 운동하고 있으나, '체험'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존재 밑바닥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체험은 시시각각 이어지고 덧붙여지면서 하나의 큰 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집 속에는 무수한 크고 작은 체험들이 살고 있으며, 그것들은 다른 체험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각기 개별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을 바꾸면 통시성·공시성과 함께 개별성을 지니는 것이 체험이며, 역사성. 시대성과 함께 또한 개인성을 지니는 것이 체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체험'을 몇 개의 국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편의상 나는 그것을 제1의 체험 – 선험적 체험과, 제2의 체험 – 경험적 체험으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나누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전술한 바처럼 체험이 지니고 있는 원래적인 복합성 때문이고, 둘째는 지금까지 진행되어오며 수없는 논쟁의 파장을 일으킨 문학상 또는 철학상의 어떤 분류도 이 모두를 포함하지 못하고 있다는 나 나름의 반성 때문입니다. 셋째는 첫째와 둘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만, 문학이란 결국 그 어느 체험의 일면적인 표현이 아니라, 복합적이며 상호 형성적인 표현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선험적 체험은 그 어휘가 의미하는 일반적인 뜻처럼 우리의 존재의 밑바닥을 떠받치고 있는 원천적 체험입니다. 체험의 원질 또는 체험의 토대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경험적 체험처럼 직접적으로 문학세계에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그것은 문학의 내부에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으면서 그 문학을 심화시키고, 특수한 개인적 체험들을 보편화시킵니다. 경험적 체험은 글자의 뜻 그대로 수많은 개인적 경험들, 개별적이며 창조적으로 승화될 수 있는 문학의 소재적 차원의 체험들입니다. 여기에는 현실적이며 현재적인 모든 경험들이 포함됩니다. 즉 현실의 계층의식 다시 말하면 사회구조에서 오는, 개인과 개인의 상호의식에서 배태되는 계층의식이 포함되며 이들에 기인하는 바가 많은 미적 체험이 관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미학자는 인생과 예술을 포도와 포도주에 비유하였습니다. 포도주는 포도로 만들지만, 그러나 포도주는 이미 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포도주라는 예술은 포도를 소재로 하지만, 다시 말해서 인생의 체험들에서 그 소재를 가져오지만 그것은 변형되어야만 포도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예술이라는 말은 그대로 문학이라고 바꾸어 놓아도 좋을 것이다.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것, 수용자인 독자와 창작자인 시인. 작가가 만나게 하는 것 – 그것이 변형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는 변형은 소위 형식주의자들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형식주의자들의 문학다움은 문학 장치들에 의해서 감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의 변형은 선택이라는 사유(思惟)의 행위 뒤에 현실적이며 현재적으로 오는 것을 말합니다. 또 진정한 문학의 변형은 변형 그것 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체험의 틀 안에서 선택된 변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형됨으로써 인간들과 인간들을 하나의 정서로 연결시키는 보편성과 동시에 개별적 인간들에게 어떤 사유와 체험을 주는 특수성의 꿈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문학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문학의 변형은 체험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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