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그동안 일부 보수적 전통주의자들과 급진적 사회참여 주의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적 속성을 지적하여, 전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 경박하고 난해한 실험문학일 뿐이라고, 그리고 후자는 그것이 사회비판력이 결여된 유미주의 문학일 뿐이라고 비판해 왔습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요?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온 아방가르드의 정의는 첫째, 사회적 저항 즉 당대의 지배적인 문화의 미학, 윤리 그리고 정신적 가치에 대한 저항, 둘째, 심미적 행동주의 예술에 있어서 의식, 의미 그리고 행동을 변화시키는 매개체가 되는 예술적 혁신, 셋째, 예술의 역사적 사명의식 즉 새로운 예술형식을 통한 이상적 미래의 구현 등으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방가르드정신이나 아방가르드 문학이 곧 맹목적인 실험소설이나 심미주의적인 비사회 참여 소설이라는 편견은 수정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물론 현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아방가르드 정신과 과거의 아방가르드 미학이 모든 면에서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컨대 챨스 러셀(Charles Russell)이 지적하고 있듯이, 모더니스트들의 아방가르드 정신은 <예술과 예술가의 특권의식・・・・ 곧 예술가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외부에 존재해 있는 실험가, 혁명가, 또는 예언자로서 미래를 위한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의식을 창출해 낼 수 있다는 특권의식>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더니스트들은 예술가와 사회 사이의 대립에 보다 많은 관심이 있었으며 더 나아가 예술가는 사회발전의 변화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모더니스트들의 이러한 특권의식 즉 집단적 문화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특권을 가진 개인적 언술에 대한 신뢰, 당대의 사회와 문화로부터의 의도적 소외와 차이의식으로 인해 생성되는 예술가 개인의 특권의식에 대한 인정 그리고 그러한 특권 예술에 의한 미래사회의 조망과 설계에 대한 신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그 근원에서부터 부정하고 해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지배적인 문화체제에 대한 반발에서 부터 출발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국외자의 위치를 추구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결코 완전한 국외자가 될 수는 없다는 인식 즉 레이먼드 올더만(Raymond Olderman)의 표현을 빌면 <시스템 안에 갇혀 있으면서 밖으로 나가기를 원하는 인사이드 아웃사이더들>로서의 의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한 국외자의 존재를 인정했던 모더니즘과는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스트들처럼 당대의 사회와 문화로부터의 <차이>를 인식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차이>를 초월하여, 개인적 특권문화 속에서의 은둔 대신 집단적 문화 속에서의 동참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지배적인 문화체제에 반발하면서도 동시에 역사의 주된 언술 행위(discourse)의(discourse) 내부에서 그 언술 행위를 분석하고 검증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해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아반영적(self-reflexive)> 또는 자기성찰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러한 <자아반영적> 태도, 그리고 <언술행위><언술 행위>에 대한 사회학적이라기보다는 다소간 기호학적인 분석은 곧 페터 뷔르거(Peter Bürger) 같은 사람의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예컨대 뷔르거는 1974년에 쓴 『아방가르드의 이론(Theorie der Avangards)』라는 책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는 사회비판적 또는 체제 비판적이 아닌 형식주의적 <네오 아방가르드>라고 비판하며, 따라서 그것은 모더니즘적 아방가르드의 연장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 정신은 분명 보다 더 복합적인 차원에서 사회 참여적이고 현실 참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비판이란, 모더니즘의 경우에서처럼 고립되고 반항적인 자아에서 나온다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도에서처럼, 자아와 사회, 또는 개인적인 텍스트와 집단적인 언술 행위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갈등과 충돌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아방가르드 예술이 비록 다소간 심미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고는 해도(사실 어떻게 예술이 심미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 사회비판적 요소만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사회 속에서의 예술의 위치와 기능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가 곧 예술가의 사회 비판과 연결된다는 것을 추론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자아반영적> 태도 역시 주어진 체제 안에서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성찰, 역사에 대한 탐색, 그리고 집합적 언술 행위의 분석과, 지배적인 인식소(épistémé)내부에서의 혁신을 위한 필연적인 전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적인 문화체제를 전면 부정하지 않고 그 내부에서 혁신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분명 데리다(JacquesDerrida)의 해체이론과 푸코(Michel Foucault)의 언술행위이론에 근거하고 있는 것 같은 다음 인용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명료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지배적 문화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질서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을 해주고는 있지만, 현대의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구조의 분석을 통해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되고 또 의식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린 언술 행위와 이데올로기의 심층구조를 언술 행위의 개인적 또는 집합적 제조자들에게 드러내어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구조를 그들의 새로운 행동의 주제로 만들어야 된다는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방가르드 문학이나 예술에 있어서는 언어에 대한 관심이 강조됩니다. 왜냐하면 언어야말로 언술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양식이며 자아 반영적이어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언술 행위의 생성과정과 공백과 내적 상충과 모순과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절대적 허구성을 밝혀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자아 반영적이고 분열적인 행동을 통해 그것은 언술행위의 자유스러운 유희 속에서 발견되는 개인적 자유와 논리의 가능성을 드러내 보여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방가르드 예술의 함축된 주제는 모든 언술행위의 본질적인 횡포, 그리고 더 나아가서 권력과 의미를 장악하고 있는 모든 사회제도의 횡포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배적 체제의 내부에서 행하는 해체작업(메리다)과 고고학적 발굴작업(푸코)은, 포스트모더니스트 작가들로 하여금 기존의 문화체제를 패러디(parody)한 다음 그 탈신비화된 틀 속에서 새로운 모형을 만들어내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요전략인 자유스러운 유희를 통한 패러디는 사실 기존의 가치체계 또는 기존의 절대적 진실에 대한 이들의 불신뿐만 아니라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가치체계나 새로운 진실의 존재에 대한 회의까지도 동시에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말을 바꾸면, 기존의 것에 대한 패러디를 통해 자신들이 새롭게 발견하거나 창조해낸 것도 이윽고 곧 또 다른 패러디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스트 작가들은 패러디와 자유분방한 유희를 통해 해체작업과 창조작업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분명 그것은 역사와 사회의 진보에 회의를 갖고 있는 현대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허무주의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과거와 현재의 모든 의미를 거부한다고는 해도 그들은 유희의 즐거움과 부단한 시도와 성실한 탐색작업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허무주의는 진정 바스(JohnBarth)가 정의하고 있는 대로 <유쾌한 허무주의(a cheerful nihilism)>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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