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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by 소풍같은 날 2022.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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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동안 모더니즘을 비판해 온 일부 학자나 비평가들에 의해 흔히 모더니즘의 한 아류나 후기 현상으로 오해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핫산(Ihab Hassan)의 지적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가 이미 그 내부에 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모더니즘의 연장이 아니라 그것의 극복을 위해 붙여진 것이라면 마치 탈구조주의가 구조주의에 대해 그렇듯이 그래서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도 후기 모더니즘이라기보다는<탈모더니즘>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규명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를 위해 필요불가결한 작업이 될 것입니다.

 

본고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대조시키기 위해 모더니즘의 속성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모더니즘의 중추가 되는 몇 가지 특징을 예로 들어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전제와 어떻게 다른지를 고찰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선 모더니스트들에게 있어서<역사>란 개인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이 혼합되어 조이스가 율리시즈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인간이 <깨어나려고 애쓰는 악몽>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따라서 역사는 그들과 그들이 창조해낸 작품 속 주인공들의 기억, 즉 인간의 상실과 상처의 역사에 대한 과 뒤섞였으며(엘리엇의 황무지의 첫 연은 그 한 좋은 예증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현재 속에 짙게 그림자 드리워져 있는 존재로서 파악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역사와 근접 과거를 하나의 <질책>으로 인식했던 모더니스트들은 먼 과거 곧 질서와 진리와 총체성의 근원으로서 이상화된 역사 이전의 시대에 대해서는 강력한 <향수>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향수와 악몽으로서의 과거에 대한 질책은 포크너의 고함과 분노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의식 속에 스며들어와 시간을 초월해 현재와 뒤섞이고 있습니다. 당시의 <의식의 흐름> 기법은 모더니스트들의 이러한 의식을 효과적으로 표출해 주는 데 큰 공헌을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는 더 이상 잃어버린 과거와 전통에 대한 <향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시대의 소설에서는 과거에 볼 수 있었던 개인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과의 혼합이나 과거와 현재 사이의 흐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엔 다만 역사와 사회로부터의 인간의 단절과 불연속만이 있을 뿐이고, 역사의 진행과 개인의 경험 사이의 분리가 있을 뿐입니다." 전술한 멜러드 같은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파악하는 단절적 (discontinuous) 및 파편적(fragmentary) 세계로서의 현실 인식은 이미 카프카 같은 모더니스트 작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현실과 현재를 총체성과 조화를 상실한 파편적인 세계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카프카와 바셀미(Donald Barthelme) 같은 작가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적인 차이는, 전자가 궁극적으로는 그 단편성에질서와 조화를 부여해 줄 총체성의 회복과 이피퍼니(epiphany)의 순간을 믿었던 반면, 후자는 그것들의 회복의 가능성을 불신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러한 질서의 회복에 대한 신념 자체조차도 회의한다는 점에서 명백해집니다. 비단 엘리엇 프루스트나 카프카나 토머스만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루카치(Georg Lukács) 조차도 자신의 시대를 총체성이 보이지 않게 된 상실과 실향의 시대로 인식하고, 자신이 <희랍>이라고 지칭하는 역사 이전의 상태에 대해 강력한 향수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루카치는 그 희랍적 총체성의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의 <희랍>과 총체성에 대한 향수 역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역사관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뿐만 아니라 총체성의 필요성 자체까지도 불신하고 회의합니다. 왜냐하면, 다양성과 개인의 자유에 큰 비중을 두는 그들은 총체성 뒤에 내재해 있을지도 모를 어떤 전체 주익적 획일화의 위험성마저도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셀미의 파편적 세계는 바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현실인식의 수단이 됨과 동시에 단편적인 것 그 자체에 대한 찬양도 되는 것입니다.

 

바셀미의 소설은 개인의 경험을 통해 의미 있는 비전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모든 낭만주의적 특히 모더니스트적 신념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나타난 간극과 공허 속에 존재합니다. 그의 소설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일상적 경험의 다양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지 못하며, 따라서 그의 장편과 단편들은 이미 얻을 수 없다고 알려진 것을 얻기 위한 희망 없는 노력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소설에서는 총체성의 추구 대신 오히려 모순, 불연속, 무작위, 우연 등이 포용되고 과거에 대한 <향수> 대신 과거에 대한 <패러디>가 찬양되는 것입니다. 바스 John Barth연초 도매상, 핀천 Thomas Pynchon브이, 쿠버 Robert Coo-ver 의 『공개화형』 중 그 어느 곳에서도 과거에 대한 <향수>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거기엔 다만 모순과 우연과 단절과 회의 속에서 패러디되고 있는 과거가 있을 뿐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다른 또 한 가지 특성은 그것이 모더니즘의 귀족적인 순수예술성에 대해 반발하여 대중문화와의 화해를 모색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스트 소설들은 흔히 탐정소설의 형태를 취하거나 (핀천의 49호 품목의 경매), 스파이소설(나보코프의 『희미한 불꽃, 핀천의 브이), 공상과학소설 (칼비노의 『코스미코믹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 로망스(바스의 『안식년, 쿠버의 『공개화형』), 그리고 서부 소설(브라우티건의 매 형상의 악마) 등의 형식을 빌려 창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설양식의 전통적인 결말은 이성에 의한 질서의 회복이었습니다. 예컨대 탐정소설은 종국에 혼란의 주범인 무법자가 잡힘으로써 사회의 안정을 되찾고, 스파이소설에서는 악한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지구가 평온을 되찾으며, 공상과학소설에서는 우주의 질서가 회복되면서 끝나는 것이 그동안의 전통적인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질서의 회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흔히 무질서가 찬양되면서 작품이 끝을 맺게 됩니다. 탐정소설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스트 작가는 이성과 제도를 상징하는 경찰의 무능과 함께 사실은 탐정도 범인과 마찬가지로 법의 테두리 밖에 존재하고 있는 무법자(outlaw)라는(outlaw)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독자와 탐정의 추리와 예측은 끝내 빗나가며 미스터리도 해결되지 않은 채 종말을 맞습니다. 이러한 작품 속에서는 이성이나 정신력에 의한 질서의 회복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 (결국 그것이 바로 불합리한 현실의 참모습이니까) 속에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게 됩니다(핀천의 브이는 그 한 좋은 예증).

 

일견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서로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혀 주는 예증은 그 외에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예컨대 엘리엇의 황무지는 외면상으로는 단편적이고 몽타주적인 수법을 쓰고는 있지만, 그 내면에는 독자가 현대의 성배탐색에 동참할 때 생성되는 신화적 의식을 통해 파편적인 것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조화를 이루도록 하여 궁극적으로는 질서를 회복하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총체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바셀미의 백설공주죽은 아버지도시생활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심층구조적 질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핀천의 49호 품목의 경매에서도 역시 질서의 회복의 기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은 채 작품이 끝이 납니다. 더욱 핀천은 <심지어 자신의 예술의 영역에서조차 경험을 형성하고 질서를 부여할 마음의 힘(the power of the mind)을 믿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스트들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커스 클라인 Marcus Klein 같은 비평가는 핀천의 계시록적 비전(apocalyptic vision)을 모더니스트들의 이피퍼니(epiphany)와 동일선상에 놓고 그를 다분히 전통적인 모더니스트 작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더니스트들의 이피퍼니가 계시의 현현, 즉 진리의 깨달음의 순간 그리고 질서의 회복의 순간이 되는데 반해(조이스의 경우엔 다소의 자아 반영적 성찰의 병행되기도 하지만), 핀천의 계시록적 비전은 인류문명의 최후의 파멸을 함축하고 있으며 계시는 결코 현현되지 않은 채 <무질서의 극한>에서 유보의 상태로 끝이 난다는 점에서 핀천은 모더니스트가 아닌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베(Paul A. Bove)의 지적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포스트모던 소비문화시대에 있어서 일시적이지만 안정된 인간의 가치의 가능성과 현실적 차이에 가면을 씌우려는 사회적. 언어적 헤게모니를 특성으로 하는 모더니즘적 유산을 파괴하고 축출하려는 새로운 문학 형태이며,, 그런 의미에서 스티빅(Philip Stevick)의 말처럼 <더 이상 모더니스트 대가들을 지향하지 않는> 새로운 인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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